카테고리 없음

호랭이 할머니와 점순이 누나

파파스법 2024. 11. 15. 08:46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참고로 초등학교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 이므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은

문화적 충격에 의한 뇌졸증이 우려되므로

이점 유념하고 읽으시기를 부탁드리고

필요시 읽지 않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특히 임산부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글을 읽고 욕나오시는 분들이 많을 것을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글을 강행하여 쓰는 이유는

그 욕은 욕을 하시는 분들의 문제이지 결코 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욕이 나오시는 분들은

왜 욕이 나오는지 자신을 한번 둘러 보시기 바랍니다.

=======================================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복도를 통하여 저 먼 곳의 교실에서부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순간 저는 바짝 긴장을 합니다.

수업하시는 선생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웅성거림의 정체에 온갖 신경이 곤두섭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창피해서 말도 못 꺼내겠는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고

옆교실에서 한마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호랭이 할머니다.

 

순간 모든 반우들의 시선이 저와 또 한사람, 같은 반의 사촌에게로 집중됩니다.

선생님도 잠시 수업을 중단하시고,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저와 사촌은 쥐죽은 듯 고개를 떨구고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더욱 괴로운 것은 이러한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겁니다.

 

애들이 말을 안들으면 뚜드려 패서라도 가르쳐야 돼.

사람이 먼저 돼야지, 머리좋고 인간이 안되면 사기꾼 밖에 안되야

공부가르치는 게 먼저가 아냐.

먼저 사람을 맹글어 사람을..

말 안듣는 놈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 싫컷 패서라도 사람을 맹글어. 사람을.

 

 

선생이 돼 가지고, 말 안듣는 놈들 내버려두면,

그건 선생놈(님이 아님)도 아냐

선생 당장 때려쳐

그래가지고 애들이 뭘 배우겠어..

내일 당장 때려쳐.

 

기세가 등등하십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모두가 신발을 벗고 사용하는 마루바닥으로 된 교실과 복도인데.....

흰 고무신을 신은 채 활보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한 손에는 회초리인지 담뱃대 인지 정체가 모호한 아주 긴 담뱃대를 들고 활보를 하고 계십니다.

 

주로 혼자 전교의 교실을 순례 하시지만,

가끔 한번씩은 교장선생님이 2보뒤에서 수행을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의 그런 날에는

일단 교장실을 먼저 들러 교장선생님에게 일장 훈시를 하신 걸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적당히 듣다가 지치실 때 쯤

 

이제 그만하시고 손자 손녀와 증손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러 가셔야죠.

할머니의 유일한 낙이신데....

(이 부분은 저의 추측입니다.)

 

그렇습니다

호랭이 할머니에게는 이 학교에 손자와 손녀가 즐비하고 증손까지 섞여 있습니다.

 

할머니에게는 6남1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6남중 5번째 아들은 6.25때, 순경으로 근무하시다 강경전투에서 전사하시고

5명의 아들에게서 얻은 손자가 15명, 손녀가 15명 합계 30명의 친손자가 있습니다.

고명딸이 시집가서 또 6남 1녀를 낳았습니다. 외손이 7명.

 

우리 할아버지는 7대 독자랍니다.

1대를 30년으로 치면 210년, 이조시대 중엽부터 독자로 내려온 집안에 호랭이 할머니가 시집 와서

이 많은 자손들을 번성시켜 놓았으니 큰 소리 칠 만도 합니다.

 

요즘 같으면 국민훈장 다산장은 따 놓은 당상일텐데...

 

================================

 

호랭이 할머니가 7대독자에게 시집을 오게된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손이 귀했던 7대독자는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7살에 어머니마져 이 세상을 등집니다.

오갈데 없는 어린 고아는 고모네 집에 가서 일을 도와 주면서 밥이나 얻어먹는 신세가 됩니다.

보릿고개라는 용어가 있던 시절 ,

학교를 가는 것은 언감생심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먹는것도 변변치 않은 상태에서 어린나이에 고된 일만을 도맡아 하다보니 급기야 병이 들고 들어 눕게 됩니다.

 

때마침 안동권씨의 집안에 먼 친척이 말을 타고 이 집을 방문하게 됩니다.

옛날에 말을 타고 다닐 정도면 , 시쳇말로 한가닥 하는 집안이었답니다.

 

윗목에 누어있는 저 젊은이는 뉘신가?

몸이 아주 안좋아 보이는데...

 

예, 저희 집사람 친정조카인데,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고아가 된지라 제가 거두어 잔일이나 시키면서 끼니를 연명해 주고 있습니다.

 

병이 들어 시름 시름 앓고 있는데 약도 변변히 쓰지 않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젊은이를 이리 저리 유심히 살펴 보십니다.

 

내가 이 사람 사위 삼아야겠네...

 

아니, 어르신 방금 하신 말씀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불알 두쪽 밖에 없는 천애고아를,

지체가 높으신 어르신께서 뭐가 답답해서 사위를 삼으신다는 건가요?

천부당 만부당 하십니다.

 

아닐세.

이 사람만이 우리 집안을 지켜줄 수 있네.

이 사람 내가 사위 삼겠네.

 

세월이 흘러 흘러 강산도 여러번 바뀐후

호랭이 할머니의 친정은 몰락했고, 친정아버지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모든 자손들이, 장녀였던 호랭이 할머니의 그늘에서 덕을 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친정아버지는 사위 소유의 산에 유택(묘)을 마련하게 됩니다.

 

============================

 

옛날에는 정월이면, 세배를 다니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통상은 3,4일이나 1주일이내에 근동을 돌면서 집집마다 세배를 합니다.

세배를 하고 나면, 주안상을 차려내기도 하고, 때가 되면 떡국을 대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에는 정월 대보름 까지도 세배객이 찾아옵니다.

한 1주일 까지는 근동의 십리 이내의 근동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 이후는 20리 30리 50리 밖에서 한나절 걸려서 걸어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저희 아버님에게 세배를 하러 오시는 분들도 있지만,

뒤 늦게 오시는 장거리 손님들은 대개가 할머니에게 세배를 하러 오시는 분들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때는 그게 이해가 안갔습니다.

이제 제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고 나니

먼거리를 몇십리씩을 걸어서 세배를 하러 가는 것이 조금씩 이해가 갑니다.

 

=============================

 

우리 집안에는 다른 집안과 다른 한가지의 불문율이 있습니다

사촌의 자녀, 즉 당질들이 아버지의 사촌들을 부르 때에는 아저씨라고 부르는게 우리나라의 전통적이 호칭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집안에서는 그냥 다 삼촌입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불러 왔기 때문에 모두가 다 그렇게 알고 큽니다.

모든 사촌들까지 한 울타리에서 대가족 제도로 살면서 형편에 따라 분가를 했기 때문에 지금 까지도 사촌인지 친형제인지 분간이 잘 안됩니다.

 

5명의 아들들이 각자 자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같은 또래의 나이끼리, 끼리 끼리 어울리게 됩니다.

 

누나와 형님들은 그들 나름대로 생존 경쟁속에 치고 박고 싸우면서 대화와 타협을 배우게 되고, 미운정 고운정으로 범벅이 됩니다.

읍내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사촌 여럿이 자취를 하게되고, 경제도 공동 경제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특히 큰집의 막내아들과 셋째 집의 둘째 아들, 여섯째 집의 큰 아들은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 동기 동창입니다.

거기에 사촌 여동생 하나가 우리 동기동창과 결혼을 하고, 또 다른 동창하나는 어느새 우리 조카딸 하나를 꼬드겨 살림을 차렸습니다.

해서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우리 5명이 모이면 농담으로 바로 동기동창 동창회 개회식합니다.

 

===================================

 

제가 군에 자원 입대하여, 김해 육군 공병학교에서 뺑뺑이 치고 있을 때 호랭이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연히 관보를 쳤지만 훈련병이었기 때문에 공병학교 졸업식날 뒤늦게 전달받아서 저는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습니다.

 

어려서는 할머니의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많은 상처를 받아서 할머니를 증오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가면서 미운정 고운정이 많이 들고, 한 편으로는 그 많은 식구들을 통솔하려면 불가피 한 면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기에 군에 오기 전에 아프셔서 누우신 것을 보고 제가 제대할 때까지라도 살으셔야 할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돌아가신 겁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어려서 그토록 싫어 했던 호랭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것은 아마 제가 호랭이 할머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손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유일한 손자만이 호랭이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유일한 손자가 되었습니다.

 

첫 휴가를 나와 가족들이 모였을 때 할머니 장례식을 어떻게 치루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야! 말도 마라.

아마 그런 장례식 세상천지 처음 일꺼다.

상여행렬에 따르는 상주들만 해도 여느집 조문객 다 합친거보다 많았으니까.

 

해서 계산을 해보았답니다.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 수를 세어 보았답니다.

큰 종이에 족보를 그려가면서 세어 보았답니다.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

며느리는 빼고, 사위도 빼고, 외손자가 낳은 딸은 세고, 손녀가 시집가서 낳은 아들은 세고....

그야말로 할머니의 피가 흐르는 사람의 숫자를 ....

 

현재 살아 있는 사람 98명. 뱃속에 있는 사람 3명,

조금만 더 살으셨으면 100명을 채울 수 있었을 텐데...

 

==================

 

호랭이 할머니 께서는 본인의 장례식을 남다르게 준비해 놓고 계셨었습니다.

 

할마버지께서는 환갑이 되던 해의 정월에 환갑잔치를 못 얻어 잡수시고 돌아 가셨기 때문에.

 

본인의 환갑잔치를 한 바로 다음 날부터 본인의 장례식 준비를 손수 하셨답니다.

 

글이 너무 길어 지는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다음에 이어집니다.

 

**   이 글은 2023년 6월 19일 무한매수 카페0에 올린 글입니다. **